1946년 10월 · 대구에서 시작된 민중항쟁
1946년 10월,
대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굶주림과 억압,
청산되지 않은 친일 권력에 맞서
노동자와 시민, 농민과 학생이 함께 일어섰습니다.
해방은 되었으나,
우리들의 봄은 오지 않았습니다
굶주림과 억압,
청산되지 않은 과거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지만 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식량정책의 실패와 쌀 사재기로 물가는 폭등했고, 거리에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시민들을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민을 탄압했던 친일 경찰들이 다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시작된 총파업은 대구로 번졌습니다. 10월 1일 대구역 인근에 모인 노동자와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해 노동자 두 명이 숨지면서 쌓여 있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10월항쟁의 흐름
해방과 사회적 혼란
1945년 해방 이후 식량난과 물가상승, 실업과 질병이 시민의 일상을 위협했습니다.
노동자 총파업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시작된 총파업은 이튿날 대구로 번졌고, 9월 30일에는 대구 노동자 약 4,000명이 참여했습니다.
10월 1일 대구
대구역 인근에서 경찰의 발포로 철도노동자 김용태와 연탄공장 노동자 황말용이 숨졌습니다. 이 소식은 다음 날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항의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경북과 전국으로 확산
10월 2일 밤부터 인근 군으로 퍼진 항쟁은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됐고 노동자·농민·학생과 시민이 참여했습니다.
진압과 국가폭력
미군정은 10월 2일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경찰과 우익단체의 검거·보복이 이어지며 많은 시민과 유가족이 오랜 탄압과 침묵을 겪었습니다.
더 깊이 살펴보기
10월항쟁 기록과 자료
사건의 배경부터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과정까지 주제별로 살펴보세요.
폭동이라는 낙인을 지우고,
항쟁이라는 이름을 되찾기까지
10월항쟁의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억과 기록, 시민의 참여로 역사를 이어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