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에서 진실규명과 기억의 현재까지
연표
10월항쟁은 1946년 10월의 며칠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의 사회 변화와 총파업, 국가폭력, 유족과 시민의 진실규명 운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살펴봅니다.
항쟁의 배경
해방
전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향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미군의 남한 진주
미군정이 실시되고 기존 행정·경찰 조직이 유지되면서 친일 경찰이 다시 권력을 담당합니다.
대구 기아 시위
쌀값 폭등과 배급 부족에 항의한 시민들이 도청과 부청에서 식량 배급을 요구합니다.
콜레라와 식량난 심화
콜레라 확산과 교통 차단, 강제 미곡수집이 겹치며 대구·경북의 생존 위기가 깊어집니다.
전국 총파업과 대구 노동자의 참여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
철도 파업이 전국 총파업의 시작이 됩니다.
대구 철도노동자 파업
기관구 노동자를 중심으로 파업이 시작되고 대구철도쟁의단이 쌀 배급, 임금 인상, 해고 반대 등을 요구합니다.
공공부문과 산업 전반으로 확대
우편·전화·섬유·금속·출판·교통·화학 등 노동자가 동맹파업에 들어갑니다.
대구시투쟁위원회 결성
대구지역의 여러 공장이 파업에 동참하고 약 4,000명의 노동자가 참여합니다.
발포와 항쟁, 계엄령
경찰 발포와 노동자 희생
대구역 인근에 모인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무장경찰이 발포해 김용태와 황말용 등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항의
대구의대 학생들이 희생자의 시신을 운구하며 거리로 나서고 여러 학교 학생과 시민이 합류합니다.
대구경찰서와 대구역 인근 시위
경찰이 무장을 반납하고 철수한 뒤 수감자들이 석방됩니다. 대구역 인근에서는 경찰의 추가 발포로 다시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대구 계엄령 선포
미군정은 집회와 행진, 야간 통행과 인쇄물 배포를 금지하고 대규모 검거를 시작합니다.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
항쟁은 인근 군과 경북 각지, 남한 여러 지역으로 번져 12월까지 이어집니다.
계엄령 해제
대구와 경북 일대의 계엄령이 해제되지만 야간 통행금지와 참가자 탄압은 계속됩니다.
학살, 침묵, 진실규명
국민보도연맹 조직
10월항쟁 참가자와 민간인이 보도연맹에 가입되며 요시찰 대상으로 관리됩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희생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자들이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영천 아작골 등에서 적법 절차 없이 희생됩니다.
10월항쟁유족회 결성
유족들이 항쟁의 이름을 내걸고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을 시작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결정
국가 책임을 확인하고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을 권고합니다.
대구시 위령사업 지원 조례 제정
공식 조례 명칭에 ‘10월항쟁’이 사용됩니다.
가창댐 아래 위령탑 건립
10월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집니다.
가창 용계리 유해 발굴
대구에서 처음 국가 차원의 유해 발굴이 진행됩니다.
10월항쟁 발상지 표지석 설치
항쟁 79주년에 대구콘서트하우스 인근에 발상지 표지석이 세워집니다.
다음 자료
10월항쟁이란
해방에서 진실규명과 기억의 현재까지
연표
10월항쟁은 1946년 10월의 며칠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의 사회 변화와 총파업, 국가폭력, 유족과 시민의 진실규명 운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살펴봅니다.
항쟁의 배경
해방
전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향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미군의 남한 진주
미군정이 실시되고 기존 행정·경찰 조직이 유지되면서 친일 경찰이 다시 권력을 담당합니다.
대구 기아 시위
쌀값 폭등과 배급 부족에 항의한 시민들이 도청과 부청에서 식량 배급을 요구합니다.
콜레라와 식량난 심화
콜레라 확산과 교통 차단, 강제 미곡수집이 겹치며 대구·경북의 생존 위기가 깊어집니다.
전국 총파업과 대구 노동자의 참여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
철도 파업이 전국 총파업의 시작이 됩니다.
대구 철도노동자 파업
기관구 노동자를 중심으로 파업이 시작되고 대구철도쟁의단이 쌀 배급, 임금 인상, 해고 반대 등을 요구합니다.
공공부문과 산업 전반으로 확대
우편·전화·섬유·금속·출판·교통·화학 등 노동자가 동맹파업에 들어갑니다.
대구시투쟁위원회 결성
대구지역의 여러 공장이 파업에 동참하고 약 4,000명의 노동자가 참여합니다.
발포와 항쟁, 계엄령
경찰 발포와 노동자 희생
대구역 인근에 모인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무장경찰이 발포해 김용태와 황말용 등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항의
대구의대 학생들이 희생자의 시신을 운구하며 거리로 나서고 여러 학교 학생과 시민이 합류합니다.
대구경찰서와 대구역 인근 시위
경찰이 무장을 반납하고 철수한 뒤 수감자들이 석방됩니다. 대구역 인근에서는 경찰의 추가 발포로 다시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대구 계엄령 선포
미군정은 집회와 행진, 야간 통행과 인쇄물 배포를 금지하고 대규모 검거를 시작합니다.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
항쟁은 인근 군과 경북 각지, 남한 여러 지역으로 번져 12월까지 이어집니다.
계엄령 해제
대구와 경북 일대의 계엄령이 해제되지만 야간 통행금지와 참가자 탄압은 계속됩니다.
학살, 침묵, 진실규명
국민보도연맹 조직
10월항쟁 참가자와 민간인이 보도연맹에 가입되며 요시찰 대상으로 관리됩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희생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자들이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영천 아작골 등에서 적법 절차 없이 희생됩니다.
10월항쟁유족회 결성
유족들이 항쟁의 이름을 내걸고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을 시작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결정
국가 책임을 확인하고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을 권고합니다.
대구시 위령사업 지원 조례 제정
공식 조례 명칭에 ‘10월항쟁’이 사용됩니다.
가창댐 아래 위령탑 건립
10월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집니다.
가창 용계리 유해 발굴
대구에서 처음 국가 차원의 유해 발굴이 진행됩니다.
10월항쟁 발상지 표지석 설치
항쟁 79주년에 대구콘서트하우스 인근에 발상지 표지석이 세워집니다.
다음 자료
10월항쟁이란
해방에서 진실규명과 기억의 현재까지
연표
10월항쟁은 1946년 10월의 며칠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의 사회 변화와 총파업, 국가폭력, 유족과 시민의 진실규명 운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살펴봅니다.
항쟁의 배경
해방
전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향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미군의 남한 진주
미군정이 실시되고 기존 행정·경찰 조직이 유지되면서 친일 경찰이 다시 권력을 담당합니다.
대구 기아 시위
쌀값 폭등과 배급 부족에 항의한 시민들이 도청과 부청에서 식량 배급을 요구합니다.
콜레라와 식량난 심화
콜레라 확산과 교통 차단, 강제 미곡수집이 겹치며 대구·경북의 생존 위기가 깊어집니다.
전국 총파업과 대구 노동자의 참여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
철도 파업이 전국 총파업의 시작이 됩니다.
대구 철도노동자 파업
기관구 노동자를 중심으로 파업이 시작되고 대구철도쟁의단이 쌀 배급, 임금 인상, 해고 반대 등을 요구합니다.
공공부문과 산업 전반으로 확대
우편·전화·섬유·금속·출판·교통·화학 등 노동자가 동맹파업에 들어갑니다.
대구시투쟁위원회 결성
대구지역의 여러 공장이 파업에 동참하고 약 4,000명의 노동자가 참여합니다.
발포와 항쟁, 계엄령
경찰 발포와 노동자 희생
대구역 인근에 모인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무장경찰이 발포해 김용태와 황말용 등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항의
대구의대 학생들이 희생자의 시신을 운구하며 거리로 나서고 여러 학교 학생과 시민이 합류합니다.
대구경찰서와 대구역 인근 시위
경찰이 무장을 반납하고 철수한 뒤 수감자들이 석방됩니다. 대구역 인근에서는 경찰의 추가 발포로 다시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대구 계엄령 선포
미군정은 집회와 행진, 야간 통행과 인쇄물 배포를 금지하고 대규모 검거를 시작합니다.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
항쟁은 인근 군과 경북 각지, 남한 여러 지역으로 번져 12월까지 이어집니다.
계엄령 해제
대구와 경북 일대의 계엄령이 해제되지만 야간 통행금지와 참가자 탄압은 계속됩니다.
학살, 침묵, 진실규명
국민보도연맹 조직
10월항쟁 참가자와 민간인이 보도연맹에 가입되며 요시찰 대상으로 관리됩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희생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자들이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영천 아작골 등에서 적법 절차 없이 희생됩니다.
10월항쟁유족회 결성
유족들이 항쟁의 이름을 내걸고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을 시작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결정
국가 책임을 확인하고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을 권고합니다.
대구시 위령사업 지원 조례 제정
공식 조례 명칭에 ‘10월항쟁’이 사용됩니다.
가창댐 아래 위령탑 건립
10월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집니다.
가창 용계리 유해 발굴
대구에서 처음 국가 차원의 유해 발굴이 진행됩니다.
10월항쟁 발상지 표지석 설치
항쟁 79주년에 대구콘서트하우스 인근에 발상지 표지석이 세워집니다.
다음 자료
10월항쟁이란
해방에서 진실규명과 기억의 현재까지
연표
10월항쟁은 1946년 10월의 며칠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의 사회 변화와 총파업, 국가폭력, 유족과 시민의 진실규명 운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살펴봅니다.
항쟁의 배경
해방
전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향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미군의 남한 진주
미군정이 실시되고 기존 행정·경찰 조직이 유지되면서 친일 경찰이 다시 권력을 담당합니다.
대구 기아 시위
쌀값 폭등과 배급 부족에 항의한 시민들이 도청과 부청에서 식량 배급을 요구합니다.
콜레라와 식량난 심화
콜레라 확산과 교통 차단, 강제 미곡수집이 겹치며 대구·경북의 생존 위기가 깊어집니다.
전국 총파업과 대구 노동자의 참여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
철도 파업이 전국 총파업의 시작이 됩니다.
대구 철도노동자 파업
기관구 노동자를 중심으로 파업이 시작되고 대구철도쟁의단이 쌀 배급, 임금 인상, 해고 반대 등을 요구합니다.
공공부문과 산업 전반으로 확대
우편·전화·섬유·금속·출판·교통·화학 등 노동자가 동맹파업에 들어갑니다.
대구시투쟁위원회 결성
대구지역의 여러 공장이 파업에 동참하고 약 4,000명의 노동자가 참여합니다.
발포와 항쟁, 계엄령
경찰 발포와 노동자 희생
대구역 인근에 모인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무장경찰이 발포해 김용태와 황말용 등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항의
대구의대 학생들이 희생자의 시신을 운구하며 거리로 나서고 여러 학교 학생과 시민이 합류합니다.
대구경찰서와 대구역 인근 시위
경찰이 무장을 반납하고 철수한 뒤 수감자들이 석방됩니다. 대구역 인근에서는 경찰의 추가 발포로 다시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대구 계엄령 선포
미군정은 집회와 행진, 야간 통행과 인쇄물 배포를 금지하고 대규모 검거를 시작합니다.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
항쟁은 인근 군과 경북 각지, 남한 여러 지역으로 번져 12월까지 이어집니다.
계엄령 해제
대구와 경북 일대의 계엄령이 해제되지만 야간 통행금지와 참가자 탄압은 계속됩니다.
학살, 침묵, 진실규명
국민보도연맹 조직
10월항쟁 참가자와 민간인이 보도연맹에 가입되며 요시찰 대상으로 관리됩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희생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자들이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영천 아작골 등에서 적법 절차 없이 희생됩니다.
10월항쟁유족회 결성
유족들이 항쟁의 이름을 내걸고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을 시작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결정
국가 책임을 확인하고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을 권고합니다.
대구시 위령사업 지원 조례 제정
공식 조례 명칭에 ‘10월항쟁’이 사용됩니다.
가창댐 아래 위령탑 건립
10월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집니다.
가창 용계리 유해 발굴
대구에서 처음 국가 차원의 유해 발굴이 진행됩니다.
10월항쟁 발상지 표지석 설치
항쟁 79주년에 대구콘서트하우스 인근에 발상지 표지석이 세워집니다.
다음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