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과 전개

← 10월항쟁

해방의 기대에서 전국적 저항까지

발생과 전개

식량난과 실업, 친일 경찰의 재등장 속에서 시작된 노동자 총파업은 10월 1일 경찰 발포를 계기로 시민 항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945-1946

항쟁으로 이어진 조건

해방과 새 나라에 대한 기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전국에서 만들어졌고, 대구에서도 좌우 세력이 함께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준비했습니다.

미군정의 시작

미군정은 기존 행정과 경찰 조직을 유지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경찰 다수가 다시 치안 권력을 담당하면서 민중의 분노가 커졌습니다.

기아 시위와 강제 미곡수집

쌀값 폭등과 식량난이 심해지자 시민들은 도청과 부청 앞에서 배급을 요구했습니다. 농촌에서는 강압적인 미곡수집이 이어졌습니다.

콜레라와 도시 봉쇄

콜레라가 번지자 대구 주변 교통이 차단되었고, 농촌에서 식량을 들여오던 시민의 생계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9월 총파업

노동자의 요구가 시민의 저항과 만나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의 파업은 전국으로 빠르게 번졌습니다. 대구에서는 9월 24일 철도노동자를 시작으로 우편·전화·직물·금속·출판·교통·화학 부문의 노동자가 동참했습니다. 9월 30일에는 대구에서 약 4,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쌀 배급, 임금 인상, 해고 반대, 일급제 반대, 노동자 석방 등을 요구했습니다. 일반 시민은 후원단을 꾸리고 동정금을 내며 파업을 지지했습니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전국 총파업 시작

9월 24일

대구 철도노동자 파업, 여러 산업으로 확대

9월 30일

대구지역 공장과 공공부문 노동자의 광범한 참여

10월 1일

노동자 총파업과 식량을 요구하는 시민의 투쟁이 결합

10월 1-2일

발포, 희생, 그리고 시민의 봉기

1946년 10월 1일 대구 시위 발포 현장에서 경찰과 군중이 대치한 모습
1946년 10월 1일 대구 시위 발포 현장.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

10월 1일 저녁 무장경찰이 대구역 인근에 남아 있던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발포했습니다. 철도노동자 김용태와 연탄공장 노동자 황말용이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 날 대구의대 학생들은 희생자의 시신을 들것에 메고 대구경찰서로 향했습니다. 여러 학교 학생과 시민이 합류해 시위대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대구경찰서에서는 경찰이 무장을 반납하고 철수했으며, 시민들은 유치장에 갇힌 100여 명을 석방했습니다.

같은 날 대구역 인근에서 경찰의 추가 발포로 다시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미군정은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집회와 행진, 인쇄물 배포를 금지했습니다.

확산과 진압

대구를 넘어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01

인근 군으로 확산

10월 2일 밤부터 대구의 저항은 달성·경산·영천·성주 등 인근 지역으로 번졌습니다.

02

경찰과 친일세력에 대한 저항

각지의 민중은 경찰서와 관공서를 점거하고, 강제 공출과 탄압에 책임이 있다고 본 관리와 친일세력에게 항의했습니다.

03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대

항쟁은 경상남도·충청남도·경기도·강원도·전라남도 등으로 이어져 12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04

계엄과 대규모 검거

미군정과 경찰은 무력과 대규모 검거로 항쟁을 진압했고, 참가자와 가족에 대한 탄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다음 자료

국가폭력과 희생

계속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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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기대에서 전국적 저항까지

발생과 전개

식량난과 실업, 친일 경찰의 재등장 속에서 시작된 노동자 총파업은 10월 1일 경찰 발포를 계기로 시민 항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945-1946

항쟁으로 이어진 조건

해방과 새 나라에 대한 기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전국에서 만들어졌고, 대구에서도 좌우 세력이 함께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준비했습니다.

미군정의 시작

미군정은 기존 행정과 경찰 조직을 유지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경찰 다수가 다시 치안 권력을 담당하면서 민중의 분노가 커졌습니다.

기아 시위와 강제 미곡수집

쌀값 폭등과 식량난이 심해지자 시민들은 도청과 부청 앞에서 배급을 요구했습니다. 농촌에서는 강압적인 미곡수집이 이어졌습니다.

콜레라와 도시 봉쇄

콜레라가 번지자 대구 주변 교통이 차단되었고, 농촌에서 식량을 들여오던 시민의 생계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9월 총파업

노동자의 요구가 시민의 저항과 만나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의 파업은 전국으로 빠르게 번졌습니다. 대구에서는 9월 24일 철도노동자를 시작으로 우편·전화·직물·금속·출판·교통·화학 부문의 노동자가 동참했습니다. 9월 30일에는 대구에서 약 4,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쌀 배급, 임금 인상, 해고 반대, 일급제 반대, 노동자 석방 등을 요구했습니다. 일반 시민은 후원단을 꾸리고 동정금을 내며 파업을 지지했습니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전국 총파업 시작

9월 24일

대구 철도노동자 파업, 여러 산업으로 확대

9월 30일

대구지역 공장과 공공부문 노동자의 광범한 참여

10월 1일

노동자 총파업과 식량을 요구하는 시민의 투쟁이 결합

10월 1-2일

발포, 희생, 그리고 시민의 봉기

1946년 10월 1일 대구 시위 발포 현장에서 경찰과 군중이 대치한 모습
1946년 10월 1일 대구 시위 발포 현장.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

10월 1일 저녁 무장경찰이 대구역 인근에 남아 있던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발포했습니다. 철도노동자 김용태와 연탄공장 노동자 황말용이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 날 대구의대 학생들은 희생자의 시신을 들것에 메고 대구경찰서로 향했습니다. 여러 학교 학생과 시민이 합류해 시위대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대구경찰서에서는 경찰이 무장을 반납하고 철수했으며, 시민들은 유치장에 갇힌 100여 명을 석방했습니다.

같은 날 대구역 인근에서 경찰의 추가 발포로 다시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미군정은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집회와 행진, 인쇄물 배포를 금지했습니다.

확산과 진압

대구를 넘어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01

인근 군으로 확산

10월 2일 밤부터 대구의 저항은 달성·경산·영천·성주 등 인근 지역으로 번졌습니다.

02

경찰과 친일세력에 대한 저항

각지의 민중은 경찰서와 관공서를 점거하고, 강제 공출과 탄압에 책임이 있다고 본 관리와 친일세력에게 항의했습니다.

03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대

항쟁은 경상남도·충청남도·경기도·강원도·전라남도 등으로 이어져 12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04

계엄과 대규모 검거

미군정과 경찰은 무력과 대규모 검거로 항쟁을 진압했고, 참가자와 가족에 대한 탄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다음 자료

국가폭력과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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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기대에서 전국적 저항까지

발생과 전개

식량난과 실업, 친일 경찰의 재등장 속에서 시작된 노동자 총파업은 10월 1일 경찰 발포를 계기로 시민 항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945-1946

항쟁으로 이어진 조건

해방과 새 나라에 대한 기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전국에서 만들어졌고, 대구에서도 좌우 세력이 함께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준비했습니다.

미군정의 시작

미군정은 기존 행정과 경찰 조직을 유지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경찰 다수가 다시 치안 권력을 담당하면서 민중의 분노가 커졌습니다.

기아 시위와 강제 미곡수집

쌀값 폭등과 식량난이 심해지자 시민들은 도청과 부청 앞에서 배급을 요구했습니다. 농촌에서는 강압적인 미곡수집이 이어졌습니다.

콜레라와 도시 봉쇄

콜레라가 번지자 대구 주변 교통이 차단되었고, 농촌에서 식량을 들여오던 시민의 생계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9월 총파업

노동자의 요구가 시민의 저항과 만나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의 파업은 전국으로 빠르게 번졌습니다. 대구에서는 9월 24일 철도노동자를 시작으로 우편·전화·직물·금속·출판·교통·화학 부문의 노동자가 동참했습니다. 9월 30일에는 대구에서 약 4,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쌀 배급, 임금 인상, 해고 반대, 일급제 반대, 노동자 석방 등을 요구했습니다. 일반 시민은 후원단을 꾸리고 동정금을 내며 파업을 지지했습니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전국 총파업 시작

9월 24일

대구 철도노동자 파업, 여러 산업으로 확대

9월 30일

대구지역 공장과 공공부문 노동자의 광범한 참여

10월 1일

노동자 총파업과 식량을 요구하는 시민의 투쟁이 결합

10월 1-2일

발포, 희생, 그리고 시민의 봉기

1946년 10월 1일 대구 시위 발포 현장에서 경찰과 군중이 대치한 모습
1946년 10월 1일 대구 시위 발포 현장.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

10월 1일 저녁 무장경찰이 대구역 인근에 남아 있던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발포했습니다. 철도노동자 김용태와 연탄공장 노동자 황말용이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 날 대구의대 학생들은 희생자의 시신을 들것에 메고 대구경찰서로 향했습니다. 여러 학교 학생과 시민이 합류해 시위대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대구경찰서에서는 경찰이 무장을 반납하고 철수했으며, 시민들은 유치장에 갇힌 100여 명을 석방했습니다.

같은 날 대구역 인근에서 경찰의 추가 발포로 다시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미군정은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집회와 행진, 인쇄물 배포를 금지했습니다.

확산과 진압

대구를 넘어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01

인근 군으로 확산

10월 2일 밤부터 대구의 저항은 달성·경산·영천·성주 등 인근 지역으로 번졌습니다.

02

경찰과 친일세력에 대한 저항

각지의 민중은 경찰서와 관공서를 점거하고, 강제 공출과 탄압에 책임이 있다고 본 관리와 친일세력에게 항의했습니다.

03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대

항쟁은 경상남도·충청남도·경기도·강원도·전라남도 등으로 이어져 12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04

계엄과 대규모 검거

미군정과 경찰은 무력과 대규모 검거로 항쟁을 진압했고, 참가자와 가족에 대한 탄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다음 자료

국가폭력과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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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항쟁

해방의 기대에서 전국적 저항까지

발생과 전개

식량난과 실업, 친일 경찰의 재등장 속에서 시작된 노동자 총파업은 10월 1일 경찰 발포를 계기로 시민 항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945-1946

항쟁으로 이어진 조건

해방과 새 나라에 대한 기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전국에서 만들어졌고, 대구에서도 좌우 세력이 함께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준비했습니다.

미군정의 시작

미군정은 기존 행정과 경찰 조직을 유지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경찰 다수가 다시 치안 권력을 담당하면서 민중의 분노가 커졌습니다.

기아 시위와 강제 미곡수집

쌀값 폭등과 식량난이 심해지자 시민들은 도청과 부청 앞에서 배급을 요구했습니다. 농촌에서는 강압적인 미곡수집이 이어졌습니다.

콜레라와 도시 봉쇄

콜레라가 번지자 대구 주변 교통이 차단되었고, 농촌에서 식량을 들여오던 시민의 생계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9월 총파업

노동자의 요구가 시민의 저항과 만나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의 파업은 전국으로 빠르게 번졌습니다. 대구에서는 9월 24일 철도노동자를 시작으로 우편·전화·직물·금속·출판·교통·화학 부문의 노동자가 동참했습니다. 9월 30일에는 대구에서 약 4,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쌀 배급, 임금 인상, 해고 반대, 일급제 반대, 노동자 석방 등을 요구했습니다. 일반 시민은 후원단을 꾸리고 동정금을 내며 파업을 지지했습니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전국 총파업 시작

9월 24일

대구 철도노동자 파업, 여러 산업으로 확대

9월 30일

대구지역 공장과 공공부문 노동자의 광범한 참여

10월 1일

노동자 총파업과 식량을 요구하는 시민의 투쟁이 결합

10월 1-2일

발포, 희생, 그리고 시민의 봉기

1946년 10월 1일 대구 시위 발포 현장에서 경찰과 군중이 대치한 모습
1946년 10월 1일 대구 시위 발포 현장.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

10월 1일 저녁 무장경찰이 대구역 인근에 남아 있던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발포했습니다. 철도노동자 김용태와 연탄공장 노동자 황말용이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 날 대구의대 학생들은 희생자의 시신을 들것에 메고 대구경찰서로 향했습니다. 여러 학교 학생과 시민이 합류해 시위대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대구경찰서에서는 경찰이 무장을 반납하고 철수했으며, 시민들은 유치장에 갇힌 100여 명을 석방했습니다.

같은 날 대구역 인근에서 경찰의 추가 발포로 다시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미군정은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집회와 행진, 인쇄물 배포를 금지했습니다.

확산과 진압

대구를 넘어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01

인근 군으로 확산

10월 2일 밤부터 대구의 저항은 달성·경산·영천·성주 등 인근 지역으로 번졌습니다.

02

경찰과 친일세력에 대한 저항

각지의 민중은 경찰서와 관공서를 점거하고, 강제 공출과 탄압에 책임이 있다고 본 관리와 친일세력에게 항의했습니다.

03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대

항쟁은 경상남도·충청남도·경기도·강원도·전라남도 등으로 이어져 12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04

계엄과 대규모 검거

미군정과 경찰은 무력과 대규모 검거로 항쟁을 진압했고, 참가자와 가족에 대한 탄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다음 자료

국가폭력과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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