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항쟁이란

← 10월항쟁

사건의 배경과 역사적 의미

10월항쟁이란

1946년 가을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진 10월항쟁은 굶주림과 억압, 청산되지 않은 식민 권력에 맞선 노동자·농민·학생과 시민의 저항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의 현실

해방은 왔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민중은 스스로 새 나라를 세우고 굶주림과 억압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의 행정·경찰 조직을 다시 활용했습니다.

미곡자유화 정책의 실패와 쌀 사재기, 일본으로의 밀수출은 쌀값 폭등과 식량난을 불러왔습니다. 뒤이은 강제 미곡수집은 농민의 삶을 더욱 옥죄었습니다. 대구·경북에서는 콜레라와 실업까지 겹치며 시민의 일상이 무너졌습니다.

식량난

“쌀을 다오”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하기 어려웠고, 시민들은 빈 쌀자루를 들고 식량 배급을 요구했습니다.

실업

불안해진 노동

공장 폐업과 해고, 임금 삭감 속에서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가 전국 총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친일 경찰

청산되지 않은 권력

식민지 시기 시민을 탄압했던 경찰이 미군정 아래에서 다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항쟁의 시작

총파업과 시민의 요구가 만난 1946년 10월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시작된 총파업은 이튿날 대구로 번졌습니다. 우편·전화·섬유·금속·출판 등 여러 산업의 노동자가 동참했고, 시민들은 쌀과 일자리,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습니다.

10월 1일 대구역 인근에서 경찰이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발포해 노동자 두 명이 숨졌습니다. 다음 날 학생들이 희생자의 시신을 들것에 메고 거리로 나서자 시민들이 합류했고, 저항은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됐습니다.

1946년 10월 2일 대구 동인동 후생소 앞 시민과 학생의 연대를 묘사한 기록화
박금만 작, 「10월항쟁 기록화」. 1946년 10월 2일 대구 동인동 후생소 앞.

역사적 의미

‘폭동’이라는 낙인에서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의 생존과 자주를 위한 저항

10월항쟁은 어느 한 집단만의 사건이 아니라 노동자·농민·학생·여성과 시민이 생존권과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요구한 대중운동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금지된 기억

권위주의 정권은 사건을 ‘대구폭동’으로 규정했고, 참가자와 유가족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씌워 침묵을 강요했습니다.

진실규명과 국가 책임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식량난과 강압적 공출, 친일 관리 고용 등 사건의 배경과 국가 책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어지는 시민의 기억

유족과 시민사회는 위령사업, 기록, 교육과 연구를 통해 항쟁의 이름과 희생자의 명예를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다음 자료

발생과 전개

계속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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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배경과 역사적 의미

10월항쟁이란

1946년 가을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진 10월항쟁은 굶주림과 억압, 청산되지 않은 식민 권력에 맞선 노동자·농민·학생과 시민의 저항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의 현실

해방은 왔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민중은 스스로 새 나라를 세우고 굶주림과 억압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의 행정·경찰 조직을 다시 활용했습니다.

미곡자유화 정책의 실패와 쌀 사재기, 일본으로의 밀수출은 쌀값 폭등과 식량난을 불러왔습니다. 뒤이은 강제 미곡수집은 농민의 삶을 더욱 옥죄었습니다. 대구·경북에서는 콜레라와 실업까지 겹치며 시민의 일상이 무너졌습니다.

식량난

“쌀을 다오”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하기 어려웠고, 시민들은 빈 쌀자루를 들고 식량 배급을 요구했습니다.

실업

불안해진 노동

공장 폐업과 해고, 임금 삭감 속에서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가 전국 총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친일 경찰

청산되지 않은 권력

식민지 시기 시민을 탄압했던 경찰이 미군정 아래에서 다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항쟁의 시작

총파업과 시민의 요구가 만난 1946년 10월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시작된 총파업은 이튿날 대구로 번졌습니다. 우편·전화·섬유·금속·출판 등 여러 산업의 노동자가 동참했고, 시민들은 쌀과 일자리,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습니다.

10월 1일 대구역 인근에서 경찰이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발포해 노동자 두 명이 숨졌습니다. 다음 날 학생들이 희생자의 시신을 들것에 메고 거리로 나서자 시민들이 합류했고, 저항은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됐습니다.

1946년 10월 2일 대구 동인동 후생소 앞 시민과 학생의 연대를 묘사한 기록화
박금만 작, 「10월항쟁 기록화」. 1946년 10월 2일 대구 동인동 후생소 앞.

역사적 의미

‘폭동’이라는 낙인에서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의 생존과 자주를 위한 저항

10월항쟁은 어느 한 집단만의 사건이 아니라 노동자·농민·학생·여성과 시민이 생존권과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요구한 대중운동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금지된 기억

권위주의 정권은 사건을 ‘대구폭동’으로 규정했고, 참가자와 유가족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씌워 침묵을 강요했습니다.

진실규명과 국가 책임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식량난과 강압적 공출, 친일 관리 고용 등 사건의 배경과 국가 책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어지는 시민의 기억

유족과 시민사회는 위령사업, 기록, 교육과 연구를 통해 항쟁의 이름과 희생자의 명예를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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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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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항쟁이란

1946년 가을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진 10월항쟁은 굶주림과 억압, 청산되지 않은 식민 권력에 맞선 노동자·농민·학생과 시민의 저항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의 현실

해방은 왔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민중은 스스로 새 나라를 세우고 굶주림과 억압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의 행정·경찰 조직을 다시 활용했습니다.

미곡자유화 정책의 실패와 쌀 사재기, 일본으로의 밀수출은 쌀값 폭등과 식량난을 불러왔습니다. 뒤이은 강제 미곡수집은 농민의 삶을 더욱 옥죄었습니다. 대구·경북에서는 콜레라와 실업까지 겹치며 시민의 일상이 무너졌습니다.

식량난

“쌀을 다오”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하기 어려웠고, 시민들은 빈 쌀자루를 들고 식량 배급을 요구했습니다.

실업

불안해진 노동

공장 폐업과 해고, 임금 삭감 속에서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가 전국 총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친일 경찰

청산되지 않은 권력

식민지 시기 시민을 탄압했던 경찰이 미군정 아래에서 다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항쟁의 시작

총파업과 시민의 요구가 만난 1946년 10월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시작된 총파업은 이튿날 대구로 번졌습니다. 우편·전화·섬유·금속·출판 등 여러 산업의 노동자가 동참했고, 시민들은 쌀과 일자리,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습니다.

10월 1일 대구역 인근에서 경찰이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발포해 노동자 두 명이 숨졌습니다. 다음 날 학생들이 희생자의 시신을 들것에 메고 거리로 나서자 시민들이 합류했고, 저항은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됐습니다.

1946년 10월 2일 대구 동인동 후생소 앞 시민과 학생의 연대를 묘사한 기록화
박금만 작, 「10월항쟁 기록화」. 1946년 10월 2일 대구 동인동 후생소 앞.

역사적 의미

‘폭동’이라는 낙인에서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의 생존과 자주를 위한 저항

10월항쟁은 어느 한 집단만의 사건이 아니라 노동자·농민·학생·여성과 시민이 생존권과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요구한 대중운동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금지된 기억

권위주의 정권은 사건을 ‘대구폭동’으로 규정했고, 참가자와 유가족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씌워 침묵을 강요했습니다.

진실규명과 국가 책임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식량난과 강압적 공출, 친일 관리 고용 등 사건의 배경과 국가 책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어지는 시민의 기억

유족과 시민사회는 위령사업, 기록, 교육과 연구를 통해 항쟁의 이름과 희생자의 명예를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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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항쟁이란

1946년 가을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진 10월항쟁은 굶주림과 억압, 청산되지 않은 식민 권력에 맞선 노동자·농민·학생과 시민의 저항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의 현실

해방은 왔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민중은 스스로 새 나라를 세우고 굶주림과 억압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의 행정·경찰 조직을 다시 활용했습니다.

미곡자유화 정책의 실패와 쌀 사재기, 일본으로의 밀수출은 쌀값 폭등과 식량난을 불러왔습니다. 뒤이은 강제 미곡수집은 농민의 삶을 더욱 옥죄었습니다. 대구·경북에서는 콜레라와 실업까지 겹치며 시민의 일상이 무너졌습니다.

식량난

“쌀을 다오”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하기 어려웠고, 시민들은 빈 쌀자루를 들고 식량 배급을 요구했습니다.

실업

불안해진 노동

공장 폐업과 해고, 임금 삭감 속에서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가 전국 총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친일 경찰

청산되지 않은 권력

식민지 시기 시민을 탄압했던 경찰이 미군정 아래에서 다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항쟁의 시작

총파업과 시민의 요구가 만난 1946년 10월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시작된 총파업은 이튿날 대구로 번졌습니다. 우편·전화·섬유·금속·출판 등 여러 산업의 노동자가 동참했고, 시민들은 쌀과 일자리,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습니다.

10월 1일 대구역 인근에서 경찰이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발포해 노동자 두 명이 숨졌습니다. 다음 날 학생들이 희생자의 시신을 들것에 메고 거리로 나서자 시민들이 합류했고, 저항은 경북과 남한 여러 지역으로 확산됐습니다.

1946년 10월 2일 대구 동인동 후생소 앞 시민과 학생의 연대를 묘사한 기록화
박금만 작, 「10월항쟁 기록화」. 1946년 10월 2일 대구 동인동 후생소 앞.

역사적 의미

‘폭동’이라는 낙인에서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의 생존과 자주를 위한 저항

10월항쟁은 어느 한 집단만의 사건이 아니라 노동자·농민·학생·여성과 시민이 생존권과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요구한 대중운동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금지된 기억

권위주의 정권은 사건을 ‘대구폭동’으로 규정했고, 참가자와 유가족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씌워 침묵을 강요했습니다.

진실규명과 국가 책임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식량난과 강압적 공출, 친일 관리 고용 등 사건의 배경과 국가 책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어지는 시민의 기억

유족과 시민사회는 위령사업, 기록, 교육과 연구를 통해 항쟁의 이름과 희생자의 명예를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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